🪨 한 줄 질문과 답
Q.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거석 신전이 왜 30년이나 방치돼 있었나?
A. 1963년 이 언덕을 처음 기록한 조사팀이 지표에 널린 석회암 조각을 이슬람 시대 묘비 파편으로 보고 '공동묘지'로 적었기 때문이다. 1994년 10월 독일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가 같은 자리에서 흙에 묻힌 T자형 기둥의 머리를 알아보면서 비로소 1만 2천 년 전 유적의 발굴이 시작됐다.
발굴이 지금도 이어지는 현장이라 알려진 내용이 해마다 조금씩 바뀐다. 아래 정리는 2026년 8월까지 공개된 독일고고학연구소의 발굴 기록과 학술지 논문, 튀르키예 문화관광부 발표, 국제 통신사 보도 등 일곱 건을 맞춰 본 것이고, 이곳이 신전이었는지 사람이 살던 마을이었는지는 학계가 여전히 갈라져 있어 한쪽으로 정리하지 않았다.
인류 최초의 기념비적 건축물은 아무도 찾지 못해서 늦게 알려진 것이 아니다. 발견은 이미 되어 있었고, 다만 30년 넘게 엉뚱하게 적힌 채로 기록에 남아 있었다. 튀르키예 남동부 샨르우르파에서 동북쪽으로 15km쯤 떨어진 밋밋한 석회암 언덕, 괴베클리 테페(튀르키예어로 '배불뚝이 언덕') 이야기다. 이 언덕 아래에는 사람이 농사를 짓기도 전에 세운 원형 돌벽 구조물과 최대 5m가 넘는 T자형 석회암 기둥이 묻혀 있었다. 이 글은 그 유적의 내용보다 그것이 어떻게 발견되고, 어떻게 연대가 매겨지고, 지금 무엇이 논쟁 중인지를 순서대로 따라간다.
1963년 조사팀은 이 언덕을 공동묘지로 적고 지나갔다
괴베클리 테페가 학계 기록에 처음 등장한 해는 1963년이다. 이스탄불대학과 시카고대학이 함께 진행한 대규모 지표조사에서 조사원 피터 베네딕트는 이곳을 '우묵한 골로 나뉜 붉은 흙 둔덕 몇 개'로 기록했고, 비탈에 흩어진 다듬은 석회암 판재는 부서진 이슬람 시대 묘지의 잔해로 보았다. 다른 기록에서는 같은 조각들이 사라진 비잔틴 시대 묘지에서 나온 것으로 정리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조사팀이 완전히 헛짚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비탈을 뒤덮은 부싯돌 석기를 보고 이 언덕에 신석기 시대 유물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알아봤다. 다만 그 아래에 무엇이 서 있는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조사 보고서에 '묘지'라는 단어가 붙은 유적은 그 뒤 30년 동안 발굴 대상 목록의 위쪽으로 올라올 이유가 없었다.
네발르 초리가 물에 잠기자 슈미트는 다른 언덕을 찾아 나섰다
괴베클리 테페의 정체를 뒤집은 사람은 독일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이고, 그를 여기로 밀어 보낸 것은 물에 잠긴 다른 유적이었다. 슈미트는 1983년부터 1991년까지 인근 유적 네발르 초리에서 발굴에 참여했는데, 그곳에서 석조 조각상과 낯선 T자형 기둥이 나왔다. 그리고 1991년, 아타튀르크 댐 담수로 네발르 초리는 수몰됐다.
같은 종류의 유적이 이 지역에 더 있으리라고 본 슈미트는 옛 조사 문헌에 이름만 남은 신석기 유적들을 다시 훑기 시작했다. 1994년 10월, 한 지역 주민이 부싯돌이 많이 나오는 언덕을 알려 주었고, 그 자리에서 슈미트는 지표 위로 살짝 드러난 T자형 기둥의 머리 부분을 알아봤다. 이듬해인 1995년 샨르우르파 박물관과 독일고고학연구소 이스탄불 지부의 공동 사업으로 발굴이 시작됐다. 슈미트는 2006년부터 발굴 책임자를 맡았고 2014년 세상을 떠났다. 발견에서 본격 발굴까지의 이 경위는 발굴단이 직접 정리한 연구사 20년 기록에 남아 있다.
1만 2천 년이라는 숫자는 벽에 발린 회반죽에서 나왔다
괴베클리 테페의 나이를 지금 위치에 붙들어 놓은 것은 인클로저 D(원형 돌벽 구조물)의 벽에 발려 있던 회반죽 시료다. 이 시료의 방사성탄소 연대(유기물 속 탄소가 줄어든 양으로 잰 나이)는 9984±42 14C-BP로, 보정하면 95.4% 신뢰 구간에서 기원전 9745~9314년에 해당한다. 인클로저 D 인근 시굴 구덩이의 숯 시료도 기원전 9664~9311년 사이에 몰렸다.
다만 이 유적은 연대측정이 유난히 까다로운 편이다. 큰 원형 구조물들은 사용이 끝난 뒤 흙과 유물로 의도적으로 되메워졌기 때문에, 채움층에서 나온 시료의 나이가 곧 건축 시점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초기에는 쓸 수 있는 연대값이 열한 개뿐이어서 발굴단도 "3층의 원형 구조물들이 정확히 동시대는 아니다"라는 선에서 판단을 멈췄다. 자세한 시료별 값과 그 한계는 발굴 프로젝트가 공개한 연대측정 설명에 정리돼 있다.
| 구분 | 건축 형태 | 연대(보정값) |
|---|---|---|
| 3층(아래) | 원형·타원형 구조물과 대형 T자형 기둥 | 약 기원전 9745~9314년 |
| 2층(위) | 사각형 소형 건물과 작아진 기둥 | 약 기원전 8241~7795년 |
| 유네스코 표기 | 유적 전체(2018년 세계유산 등재) | 기원전 9600~8000년 |
신전인가 집인가, 2011년의 반론은 아직 살아 있다
슈미트는 이곳을 농경 이전 수렵채집인들이 모여 세운 성소로 보았지만, 2011년 이 해석에 정면으로 반론이 제기됐고 그 논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반론을 낸 사람은 고고학자 E. B. 배닝으로, 학술지 Current Anthropology 52권 5호에 실린 논문 「So Fair a House」에서 그는 이 건물들이 신전이 아니라 상징이 가득 새겨진 '집'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양쪽 근거를 나란히 놓으면 이렇다. 슈미트 쪽은 이곳에서 선토기 신석기(토기가 아직 없던 신석기 초기)의 전형적인 주거 건축이 확인되지 않았고, 일반 정착지에서 흔히 나오는 점토 소상 같은 유물군이 거의 없다는 점을 든다. 배닝 쪽은 신석기 시대의 집이 원래 의례 기능을 함께 가졌다는 민족지·고고학 사례를 들며, 절구와 그릇, 동물 뼈 같은 생활 흔적이 오히려 사람이 살던 곳에 가깝다고 본다.
그 뒤 발굴에서 빗물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구덩이와 곡물을 갈던 석기가 확인되면서, 이 언덕이 꽤 오래 사람이 머문 곳이었을 가능성 쪽으로 저울이 조금 기울었다. 그러나 원형 구조물들에 화덕과 생활 쓰레기층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은 그대로 남아 있어, "신전이냐 마을이냐"를 한 단어로 답하는 것은 지금도 무리다. 인근 카라한 테페에서 의례 공간과 뚜렷이 구분되는 작은 주거 건물들이 나온 것도 이 질문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발굴은 끝나지 않았다, 12개 유적으로 늘어난 '타쉬 테펠레르'
괴베클리 테페는 완성된 유적이 아니라 여전히 흙을 걷어내는 중인 현장이다. 현재 발굴은 튀르키예 문화관광부가 조율하는 '타쉬 테펠레르(돌 언덕들)' 프로젝트의 일부로, 네즈미 카룰 교수가 이끌고 있으며 샨르우르파 일대 열두 곳의 신석기 유적이 함께 조사되고 있다. 괴베클리 테페 한 곳의 특이한 사건이 아니라 지역 전체의 현상이었다는 쪽으로 그림이 바뀐 것이다.
2025년 조사에서는 인클로저 B와 D 사이 벽에 수평으로 눕혀 놓인 1만 2천 년 전 사람 석상이 나왔고, 이웃한 카라한 테페에서는 T자형 기둥 자체에 사람 얼굴을 새긴 사례가 처음 확인됐다. 이 유적들에서 나온 유물 96점은 2026년 2월부터 7월 말까지 베를린 제임스 지몬 갤러리의 특별전에서 전시됐다. 1963년 보고서에 '묘지'로 적혔던 언덕이, 60여 년 만에 유럽 한복판의 전시장까지 온 셈이다.
정리하면 괴베클리 테페의 이야기는 '무엇이 발견됐는가'보다 '누가 언제 그것을 알아봤는가'에 가깝다. 유물은 1963년에도 지표 위에 놓여 있었지만, 그것을 묘비로 볼지 신석기 거석으로 볼지는 보는 사람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에 달려 있었다. 슈미트를 이 언덕으로 데려온 것도 천재적 직감이라기보다, 물에 잠긴 유적에서 본 T자형 기둥이라는 구체적인 참조점이었다. 그리고 그 참조점 덕분에 알아본 유적조차 아직 신전인지 마을인지 확정하지 못했다. 이 유적에서 가장 확실한 사실은 어쩌면 이것 하나다. 아직 다 파지 않았다는 것.
짧게 답하는 여섯 가지 질문
Q. 지금 직접 가 볼 수 있나요?
A. 네.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뒤 정비돼 일반에 공개돼 있습니다. 주요 원형 구조물 위에는 비바람을 막는 지붕 구조물이 씌워져 있고, 방문객은 그 아래 설치된 통로를 따라 위에서 내려다보는 방식으로 관람합니다. 가장 가까운 도시는 튀르키예 남동부의 샨르우르파입니다.
Q. 언제 가는 것이 좋나요?
A. 이 지역은 한여름 낮 기온이 40도를 넘나드는 건조지대라, 그늘이 거의 없는 유적 특성상 봄과 가을이 훨씬 수월합니다. 여름에 간다면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를 권합니다. 운영 시간과 요금은 해에 따라 바뀌므로 박물관·유적 공식 안내를 확인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Q. 스톤헨지나 피라미드보다 얼마나 오래됐나요?
A. 대략 6천~7천 년 앞섭니다. 스톤헨지와 기자의 피라미드가 대체로 기원전 3000년 전후에 지어진 반면, 괴베클리 테페의 아래층 구조물은 기원전 1만 년 무렵으로 측정됩니다. 둘 사이의 간격이 스톤헨지와 현재 사이의 간격보다 깁니다.
Q. 외계인이나 초고대 문명이 세웠다는 말은 사실인가요?
A. 그렇게 볼 근거는 없습니다. 기둥의 재료는 언덕 자체의 석회암이고, 주변 채석 구역에는 떼어내다 만 미완성 기둥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제작 과정이 현장에 물증으로 남아 있습니다. 부싯돌 도구도 대량으로 나옵니다. 놀라운 것은 기술의 출처가 아니라, 금속도 토기도 없던 사람들이 이만한 노동을 조직했다는 사실 쪽입니다.
Q. 왜 흙에 파묻힌 상태로 발견됐나요?
A. 자연히 덮인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사람이 채워 넣은 것으로 봅니다. 구조물들이 사용을 마친 뒤 흙과 돌, 유물이 섞인 층으로 메워진 흔적이 확인됩니다. 다만 왜 그렇게 했는지는 아직 정설이 없고, 이 되메우기 때문에 연대측정도 까다로워졌습니다.
Q. 문자로 남긴 기록도 나왔나요?
A. 문자는 없습니다. 문자는 이보다 수천 년 뒤에 등장합니다. 대신 여우, 멧돼지, 뱀, 전갈, 새 같은 동물 부조와 사람의 팔·손을 새긴 표현이 기둥에 남아 있어, 해석은 전적으로 이 도상들을 읽는 작업에 기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