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5일, 영국 브리스톨대학교 웹사이트에 짧은 보도자료 하나가 올라왔다. 600년 넘게 아무도 읽지 못한 책의 글자를 한 연구자가 마침내 읽어냈다는 소식이었고, 세계의 매체가 그날 안에 받아 썼다.
이틀 뒤 그 글은 대학 사이트에서 내려갔다. 자리에는 몇 문장짜리 성명이 대신 붙었다. 필사본은 예일대학교 서고에 그대로 있었고, 바뀐 것은 대학 웹사이트에 걸린 문서 쪽이었다.
예일대학교 도서관이 공개한 소개 글, 브리스톨대학교가 2019년에 낸 성명, 리사 페이긴 데이비스의 2020년 필체 논문을 2026년 8월에 나란히 놓고 확인했다. 양피지 연대와 서기 수는 원문 표기를 그대로 옮겼고, 잉크가 언제 칠해졌는지는 측정 기록 자체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까지만 적는다.
지금까지 확정된 것은 글의 뜻이 아니라 물건의 이력이다 — 양피지는 1404~1438년 사이에 만들어졌고(95% 확률), 글자를 적은 손은 다섯 명으로 갈렸다.
예일대학교 바이네케 희귀본·필사본 도서관에 MS 408이라는 번호로 보관된 이 책은 흔히 보이니치 필사본으로 불린다. 고서상 빌프리트 보이니치가 1912년 이탈리아에서 사들였고, 1969년 예일대학교로 들어왔다.
책장을 넘기면 어느 알파벳에도 속하지 않는 글자가 빽빽하고, 그 사이사이에 실재하는 종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식물 그림, 별자리 도표, 초록빛 물에 잠긴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100년 넘게 암호학자·언어학자·아마추어가 달려들었지만 학계가 받아들인 해독본은 아직 없다.
책과 함께 나온 문서는 1665년에 쓰인 편지 한 통이 사실상 전부다. 프라하의 의사 요하네스 마르쿠스 마르치가 로마의 학자 아타나시우스 키르허에게 보낸 이 편지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가 이 책값으로 600두카트를 치렀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다만 마르치 본인이 그 대목을 자기가 확인한 사실이 아니라 지인에게서 전해 들은 말로 적어 두었다. 이 책의 이력이 문서로 뒷받침되는 범위는 그 한 통에서 끝난다.
보이니치 필사본의 양피지는 얼마나 정확하게 연대가 나왔나?
1404년에서 1438년 사이, 확률 95%다. 2009년 미국 애리조나대학교의 가속기질량분석 연구실(시료에 남은 탄소 동위원소를 하나씩 세는 방식)이 필사본에서 떼어낸 낱장 네 장을 측정해 얻은 값이다. 표본은 약초 그림 면과 접이식 천문 도판을 고루 포함하도록 골랐다. 측정은 시료를 태워 없애는 방식이라 낱장 가장자리에서 아주 작은 조각만 잘라냈고, 표본이 네 장에 그친 것도 그 때문이다.
중세 서유럽 필사본의 연대가 이 정도 폭으로 좁혀지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보이니치 필사본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이 책에는 저자도, 제목도, 제작 연도를 적은 간기도 없다. 다시 말해 34년이라는 이 구간은 이 책에 관해 수치로 못 박힌 거의 유일한 정보다.
🔎 연대가 가리키는 지점 방사성탄소 측정이 알려주는 것은 송아지 가죽이 준비된 시점이다. 글자가 언제 그 위에 얹혔는지는 별도의 측정 대상이다. 첫 공개 자리에서 나왔던 "잉크가 곧바로 칠해졌다"는 취지의 설명은 이후 부정확한 서술로 정리됐다.
보이니치 필사본을 한 사람이 썼다는 전제는 왜 무너졌나?
글자 모양을 하나하나 분류해 보니 서로 다른 다섯 개의 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중세학자 리사 페이긴 데이비스는 2020년 학술지 《Manuscript Studies》 5권 1호에 실은 논문에서 디지털 고문서학(글씨체의 미세한 습관으로 필사 시기와 필사자를 가려내는 방법)을 적용해 서기 다섯 명을 구분했다.
다섯 서기라는 결과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또 하나의 관찰과 맞물린다. 필사본의 텍스트는 통계적 성질이 다른 두 계열로 나뉘어 각각 커리어 A·B로 불려 왔는데, 데이비스의 분류에서 서기 1·4가 A를, 서기 2·3·5가 B를 맡은 것으로 정리됐다.
다섯 벌의 필체와 두 갈래의 통계가 함께 나온다는 사실은, 여러 사람이 같은 표기 규칙을 공유한 채 원고를 나눠 썼다는 그림과 잘 맞는다. 그렇다면 규칙을 만들어 가르친 자리와 그 규칙을 익힌 시간이 어딘가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낙서 한 사람의 취미로 설명할 때보다 따져야 할 것이 늘어난다.
브리스톨대학교의 2019년 '해독' 발표는 어디서 어긋났나?
발표가 전제한 언어의 실재를 언어학·중세학 연구자들이 곧바로 문제 삼았고, 대학은 하루 만에 보도자료를 내렸다. 제럴드 체셔는 2019년 4월 학술지 《Romance Studies》 37권 1호에 논문을 싣고, 필사본이 라틴어 계열에서 갈라져 나온 '원시 로망스어(proto-Romance)'로 적혔다고 주장했다.
브리스톨대학교는 5월 15일 이 연구를 소개하는 보도자료를 냈다가 다음 날인 5월 16일 성명과 함께 글을 내렸다. 대학은 "언어학과 중세학 분야 연구자들로부터 이 연구의 타당성에 관한 우려가 제기됐다"며 "추가 검증을 구하기 위해 웹사이트에서 해당 글을 삭제했다"고 밝혔다. 대학은 이 연구가 저자 개인의 작업이며 대학이나 중세학 센터와 제휴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함께 적었다.
미국 중세학회 사무국장이자 앞서 필체 분석을 내놓은 리사 페이긴 데이비스는 기술매체 기즈모도가 2019년 5월에 옮긴 발언에서 "'원시 로망스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하며, 해당 주장을 스스로를 증명하는 순환 논법이라고 평가했다.
📌 무엇이 내려갔는지 정확히 내려간 것은 대학이 배포한 보도자료다. 학술지 《Romance Studies》에 실린 논문 자체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기관의 홍보 문구와 학술지의 게재 상태는 별개의 절차로 움직인다.
바이네케 MS 408에서 사라진 낱장과 뒤바뀐 제본
지금 남아 있는 묶음은 처음 만들어진 순서가 아니다. 연구자들이 세어 온 바로는 적어도 낱장 열네 장이 빠져 있고, 스무 개로 추정되는 접지 묶음 가운데 열여덟 개만 확인된다. 접이식으로 접힌 큰 도판이 여러 장 섞여 있어 순서를 재구성하는 일 자체가 까다롭다.
페이긴 데이비스의 작업은 글자에서 책의 물성 쪽으로 넓어져 왔다. 예일대학교 도서관이 전한 바에 따르면 그는 다섯 서기의 작업과 책의 물리적 구조가 어떻게 맞물리는지 보기 위해 접지 구조와 제본, 꿰맨 실을 직접 살피는 실물 조사를 중요하게 여긴다. 글자를 읽지 못하는 동안에도 책이라는 물건은 계속 진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왜 아직도 보이니치 필사본을 읽지 못할까?
Q. 실물을 직접 볼 수 있나요?
A. 원본은 예일대학교 바이네케 도서관이 보관하며 일반 열람은 제한됩니다. 다만 도서관이 전체 지면을 고해상도로 디지털 공개해 두어, 누구나 온라인으로 첫 장부터 끝 장까지 넘겨볼 수 있습니다.
Q. 그림 속 식물은 실제로 존재하나요?
A. 상당수는 알려진 식물 종과 뚜렷하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특정 그림을 두고 해바라기나 특정 약초로 비정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식물학·서지학 양쪽에서 합의된 목록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Q. 인공지능이나 통계 기법으로 풀리지 않을까요?
A. 글자 빈도와 배열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특정 언어와 대응시키려는 연구가 여러 번 나왔습니다. 문제는 각 연구가 내놓은 대응표가 서로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이며, 검증의 기준이 될 대조 자료가 없다는 한계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Q. 근대에 만들어진 위조품일 가능성은요?
A. 양피지가 15세기 초에 만들어진 재료라는 점은 측정으로 확인됐습니다. 근대에 제작됐다고 보려면 그 시기의 빈 양피지를 여러 장 구해 썼다는 설명이 따로 필요합니다. 다만 15세기 사람이 뜻 없는 기호를 채워 넣었을 가능성까지 배제된 것은 아니며, 이 물음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보이니치 필사본이 지금도 좁혀 가는 것
백 년의 해독 시도가 남긴 성적표는 초라해 보이지만, 같은 기간에 물건 쪽 정보는 꾸준히 늘었다. 양피지의 연대가 34년 폭으로 좁혀졌고, 익명의 저자 한 명이라는 그림은 다섯 벌의 필체로 바뀌었으며, 흩어진 낱장의 원래 순서를 되짚는 작업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필사본을 둘러싼 소식이 2019년의 보도자료 철회처럼 요란하게 오갈 때마다 남는 것은 결국 검증 가능한 사실 몇 줄이다. 방사성탄소 측정치와 예일대학교 도서관이 정리한 필체 연구가 그 몇 줄에 해당한다. 글자가 언제 풀릴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지만, 책이 어떤 물건인지는 해마다 조금씩 또렷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