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나뭇가지 하나에서 하룻밤 사이에 길이 20센티미터짜리 얼음 실 수백 올이 솟는다. 굵기는 0.02밀리미터 안팎으로, 사람 머리카락보다 훨씬 가늘다. 같은 연구를 소개한 학회 보도자료는 이 굵기를 약 0.01밀리미터로 적었으니, 자료에 따라 0.01~0.02밀리미터 사이로 읽으면 된다.
겨울 숲에서 이 장면을 만난 사람들은 대개 서리나 곰팡이 솜을 떠올린다. 헤어 아이스(hair ice), 우리말로 머리카락 얼음이라 불리는 이 얼음은 놀랍게도 살아 있는 곰팡이가 있어야만 생긴다. 100년 가까이 아무도 증명하지 못했던 이 사실은 2015년에야 실험으로 확인됐다.
확인은 2026년 9월에 했다. 근거는 2015년 학술지 Biogeosciences에 실린 호프만·프로이스·마츨러의 논문과 유럽지구과학연맹(EGU)이 같은 해 낸 보도자료이며, 얼음 올이 몇 시간 동안 굵어지지 않고 버티게 하는 물질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저자들도 찾지 못한 채 남겨 둔 부분이다.
1918년 알프레트 베게너가 적어 둔 짐작, 2015년 세 연구자의 실험. 헤어 아이스는 곰팡이가 살아 있는 나무에서만 자란다.
헤어 아이스는 죽은 활엽수 가지에서만 자란다
헤어 아이스가 생기는 자리는 정해져 있다. 껍질이 벗겨진 죽은 활엽수 가지의 표면이고, 기온이 0도 바로 아래로 내려간 습하고 바람 없는 밤이다. 침엽수에서 자랐다는 보고는 거의 없다.
2015년 논문의 연구진이 조사한 시료는 너도밤나무와 개암나무, 서어나무, 오리나무처럼 다섯 개 과에 걸친 활엽수 가지였다. 관찰 보고가 들어온 곳도 북위 45도에서 55도 사이의 숲에 몰려 있었고, 캐나다·아일랜드·슬로베니아·인도까지 나라는 제각각이었다.
조건이 조금만 어긋나도 이 얼음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공기가 차고 건조하면 얼음 올은 짧은 시간에 승화해 사라지고, 해가 떠 기온이 올라가면 녹아 흘러내린다. 겨울 숲을 자주 걷는 사람도 평생 몇 번 못 보는 이유다.
한 번 헤어 아이스를 내놓은 가지는 이듬해에도 같은 일을 한다. 연구진이 관찰한 어떤 가지는 2년 넘게 겨울마다 얼음 올을 만들었고, 그동안 나무는 백색부후가 진행되며 색이 밝아지고 건조 밀도는 세제곱센티미터당 0.3그램 수준까지 떨어졌다. 곰팡이가 나무를 천천히 먹어 들어간 결과다.
곰팡이를 죽이면 왜 머리카락이 사라질까?
헤어 아이스가 자라던 가지에서 곰팡이만 죽여 놓고 얼리면 머리카락 대신 얇은 얼음 껍질이 생긴다. 이것이 2015년 연구진이 내놓은 가장 직접적인 증거였다.
실험은 단순했다. 헤어 아이스가 잘 자라던 가지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 일부에는 시판 곰팡이 제거제(차아염소산나트륨 4.4퍼센트)를 발랐고, 다른 조각은 90~95도의 뜨거운 물에 각각 1분, 2분, 4분씩 담갔다. 그날 밤 서리가 내렸을 때 아무 처리도 하지 않은 조각만 빽빽한 얼음 머리카락을 뒤집어썼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이다. 뜨거운 물에 담갔던 조각들도 며칠이 지나자 얼음 올을 다시 조금씩 내놓기 시작했다. 나무 속 깊이 남아 있던 균사가 되살아난 것으로 해석됐다.
간단해 보이는 이 실험이 100년 가까이 미뤄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헤어 아이스는 특정한 밤에만, 그것도 몇 시간만 존재한다. 실험을 하려면 얼음이 자라는 가지를 미리 확보해 두었다가 조건이 맞는 밤을 기다려야 하고, 결과를 확인할 기회도 그 하룻밤뿐이다.
🍄 범인은 한 종으로 좁혀졌다 헤어 아이스를 만든 나뭇가지에서 확인된 균류 자실체는 열한 종이었지만, 엑시디옵시스 에푸사(Exidiopsis effusa)는 조사한 모든 시료에 있었고 절반 이상에서는 유일하게 검출된 종이었다.
얼음을 밀어내는 힘, 아이스 세그리게이션
얼음 올을 바깥으로 밀어 올리는 힘은 아이스 세그리게이션(얼음 분리, 얼음이 자라며 주변의 물을 계속 끌어당기는 현상)이다. 얼음과 나무 사이에는 얼지 않은 얇은 물막이 남고, 이 막이 나무 속 구멍에 있던 물을 얼어붙는 면으로 계속 끌어온다.
겨울 땅에서 흙을 들어 올리는 서릿발도 같은 원리로 자란다. 다시 말해 얼음을 밀어내는 물리는 곰팡이와 상관없이 작동한다. 곰팡이를 죽인 가지에서도 얼음은 자랐다. 다만 그때의 얼음은 가느다란 올 대신 표면을 덮는 얇은 껍질이었다.
곰팡이가 열을 내서 물을 밀어낸다는 설명은 측정으로 지지되지 않았다. 연구진이 헤어 아이스가 자라는 가지와 비교 시료의 온도를 함께 재 보니 시간 평균값의 차이는 0.010도, 측정 오차와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자라난 올들은 서로 닿는 자리에서 살짝 얼어붙어 다발을 이루고, 무게에 눌려 가지 쪽으로 부드럽게 휘어진다. 사진 속 헤어 아이스가 빗질한 머리카락처럼 한 방향으로 누워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도 녹기 시작할 때까지 각각의 올은 처음의 가는 굵기를 유지한다.
무엇이 헤어 아이스 한 올의 굵기를 정할까?
굵기를 정하는 것은 나무의 방사조직(줄기 중심에서 바깥으로 뻗어 있는 세포 통로)이다. 얼음은 이 통로의 입구마다 한 올씩 솟아 나오고, 그래서 올의 두께가 세포의 지름과 비슷해진다.
스위스 베른대학교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마츨러는 2015년 EGU 보도자료에서 얼어붙는 경계면이 방사조직의 입구에 자리 잡기 때문에 자라나는 얼음의 모양이 그 입구에 의해 결정된다고 설명했다. 나무의 해부 구조가 곧 얼음의 거푸집인 셈이다.
곰팡이의 진짜 역할은 여기서 드러난다. 얼음은 원래 시간이 지나면 작은 결정끼리 뭉쳐 굵고 뭉툭해지려 한다. 그런데 헤어 아이스는 영하의 밤 내내 가느다란 형태를 유지한다. 논문은 곰팡이가 이 재결정을 막아 형태를 지킨다고 정리했다.
녹은 물에서 나온 리그닌 조각과 아직 못 찾은 억제제
녹인 헤어 아이스의 물은 맑지만 옅은 갈색을 띤다. 유기물이 섞여 있다는 신호다. 질량분석으로 들여다보니 수천 종의 유기 화합물이 검출됐고, 그 성격은 자연수에 녹아 있는 풀브산과 비슷했다.
주성분은 분해된 리그닌이었다. 리그닌은 목재 건조 중량의 20~30퍼센트를 차지하며 세포를 버티게 하는 물질인데, 동물의 효소로는 분해되지 않고 백색부후를 일으키는 일부 곰팡이와 세균만이 분해한다. 곰팡이가 나무를 먹은 흔적이 얼음 속에 남은 것이다.
함께 검출된 타닌 조각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녹은 물이 옅은 갈색을 띠는 것은 나뭇조각이 섞여서가 아니라, 나무에서 우러난 이 분자들이 얼음 올 안에 함께 갇혀 있다가 풀려나기 때문이다. 얼음 한 올은 물만 얼린 것이 아니라 나무의 성분을 품은 셈이다.
연구진은 논문 「Evidence for biological shaping of hair ice」에서 이 물질들이 큰 얼음 결정이 생기는 것을 막았을 가능성을 제시하면서도, 정확히 어떤 성분이 재결정 억제제인지는 후속 연구의 몫으로 남겼다(DOI 10.5194/bg-12-4261-2015). 범인은 잡았지만 도구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밤에 자라고 해가 뜨면 녹는다”, 헤어 아이스를 만나기 전에
Q. 한국에서도 헤어 아이스를 볼 수 있나요?
A. 2015년 논문이 정리한 관찰 보고는 북위 45~55도의 활엽수림에 몰려 있습니다. 한반도는 그보다 남쪽이라 같은 조건이 자주 갖춰지지는 않지만, 습도와 기온이 맞는 겨울 계곡의 죽은 활엽수 가지라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Q. 보러 간다면 언제 나가야 하나요?
A. 습하고 바람이 없던 밤이 지난 이른 아침입니다. 얼음 올은 주로 밤에 자라고 해가 들면 녹기 시작하므로, 해가 숲 바닥에 닿기 전이 사실상 유일한 관찰 시간대입니다.
Q. 서리나 상고대와는 어떻게 구분하나요?
A. 서리는 공기 중 수증기가 차가운 표면에 얼어붙어 생깁니다. 헤어 아이스의 물은 나무 안에서 밀려 나옵니다. 껍질이 벗겨진 죽은 활엽수 가지 표면에서만, 그것도 나뭇결 방향으로 가지런히 솟는다는 점이 구분 기준이 됩니다.
Q. 집에서 다시 만들어 볼 수 있나요?
A. 가능합니다. 연구에 앞서 스위스의 관찰자들은 헤어 아이스가 자라던 가지를 지붕이 있는 발코니에 두고 영하로 내려가는 밤마다 반복해서 얼음을 얻었습니다. 다만 곰팡이가 살아 있는 가지여야 하고, 가지를 말리거나 데우면 그 능력은 사라집니다.
2015년 연구가 특별한 이유는 결론보다 방법에 있다. 화학자와 생물학자, 물리학자가 각자 나무의 화학 성분과 곰팡이 종, 얼음의 온도를 맡아 하나의 현상을 삼면에서 재구성했다. 어느 한 분야만으로는 얼음과 곰팡이를 잇는 선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제보의 힘도 컸다. 연구진에게 관찰 보고를 보낸 사람들은 대부분 겨울 숲을 걷다 이상한 얼음을 발견한 일반인이었고, 그 보고들이 모여 헤어 아이스가 나타나는 위도와 나무의 목록이 됐다. 100년 전 베게너가 남긴 짧은 메모 한 줄도 결국 같은 종류의 기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