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캄보디아 시엠레아프를 이륙한 헬리콥터가 앙코르 북동쪽의 사암 고원 프놈쿨렌 상공을 낮게 돌기 시작했다. 동체에는 레이저 측량 장비가 매달려 있었고, 조사팀은 밭을 갈 듯 같은 항로를 오가며 밀림 위로 쉼 없이 펄스를 쏘았다.
지상에서 보면 끝없는 초록뿐인 땅이었다. 그러나 몇 달 뒤 컴퓨터 화면의 지형도에서는 나무가 전부 지워졌고, 맨땅 위로 곧게 뻗은 도로의 둔덕과 둑, 사각 연못들이 바둑판처럼 떠올랐다. 1,200년 가까이 밀림이 덮어 온 도시 마헨드라파르바타가 윤곽을 드러낸 순간이다.
수치는 2026년 9월에 학술지 앤티쿼티(Antiquity)에 실린 2019년 논문과 미국 해양대기청(NOAA)의 라이다 해설을 맞대 확인했다. 이 논문에는 2020년 정정 공지가 한 건 붙어 있는데, 정정 대상은 도판 한 장의 사진 저작권 표기였고 본문 수치는 손대지 않았다.
하늘에서 쏜 레이저가 프놈쿨렌 밀림 아래 약 40~50㎢에 걸친 계획도시, 앙코르 왕조의 첫 수도 마헨드라파르바타를 그려냈다.
라이다는 어떻게 프놈쿨렌 밀림 아래 도시를 찾아냈을까?
라이다(LiDAR·레이저로 거리를 재는 원격 탐사)는 항공기에서 쏜 레이저 펄스가 지면에 반사돼 돌아오는 시간으로 높이를 재고, 무수한 고도점으로 나무를 지운 맨땅 지도를 만들어 도시를 찾아냈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의 해설은 이 고도점 무리를 '포인트 클라우드(점 구름)'라 부른다.
빽빽한 밀림에도 잎과 가지 사이에는 틈이 있다. 수백만 발을 쏘면 일부 펄스가 틈을 지나 바닥까지 닿고, 식생에 맞고 돌아온 신호를 걸러내면 지표의 미세한 요철만 남는다. 걷는 사람 눈에는 평평한 숲 바닥도, 옛 도로와 제방 자리는 수십 센티미터의 둔덕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 투시가 아니라 복원 레이저는 나무를 뚫고 지나가지 않는다. 잎 사이 틈으로 빠져나간 일부 펄스가 닿은 맨땅의 점들을 모아, 숲을 걷어낸 지형을 다시 그려내는 것이다.
프놈쿨렌 상공의 측량은 두 차례 있었다. 2012년 크메르 고고학 라이다 컨소시엄(KALC)이 고원 일대 약 37㎢를 훑었고, 2015년 캄보디아 고고학 라이다 이니셔티브(CALI)가 범위를 975㎢까지 넓혀 산줄기 전체를 덮었다.
첫 조사는 앙코르 유적 일대까지 합쳐 370㎢를 덮은 프로젝트로, 결과는 2013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렸다(doi:10.1073/pnas.1306539110). 측량 정밀도가 곧 발견의 크기였다 — 높이 수십 센티미터의 낮은 둔덕까지 잡아낸 덕에 앙코르 연구는 '사원 단위'에서 '도시 단위'로 넘어갔다.
비용 구조도 발견을 도왔다. 헬리콥터가 한 번 뜨면 한 계절치 지상 답사보다 넓은 면적이 한꺼번에 기록되고, 같은 데이터를 여러 연구팀이 두고두고 다시 볼 수 있다. 프놈쿨렌에서는 이 데이터로 도시뿐 아니라 고원 곳곳의 옛 채석장 자리까지 함께 확인됐다.
마헨드라파르바타는 왜 '앙코르의 첫 수도'로 불릴까?
마헨드라파르바타는 앙코르 왕조를 연 자야바르만 2세가 서기 802년 즉위 의식을 치렀다고 전해지는 산 위 수도이기 때문이다. 11세기에 새겨진 스독 콕 톰 비문은 그가 여기서 '차크라바르틴(전륜성왕·세계의 왕)'을 선언했다고 기록한다.
이름 자체가 산스크리트어로 '위대한 인드라의 산'이라는 뜻이다. 크메르인에게 프놈쿨렌은 신성한 산이자 사암 채석장이었고, 훗날 앙코르와트를 지은 돌의 상당 부분도 여기서 잘려 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대 증거도 겹친다. 2019년 논문은 유적에서 얻은 고고 자료와 방사성탄소 연대가 서기 8~9세기에 몰린다고 밝혔고, 이는 비문이 전하는 자야바르만 2세의 치세(서기 770~835년)와 어긋나지 않는다.
논문을 쓴 이들은 프놈쿨렌에서 오래 발굴해 온 조사자들이다. 고고학개발재단(ADF)의 장바티스트 슈방스, 프랑스극동학원(EFEO)의 데미언 에번스, 그리고 캄보디아 압사라 국가기구의 라타 체안이 이름을 올렸다. 항공 측량 전문가와 현장 발굴자가 한 논문에 묶인 구성 자체가 이 연구의 성격을 보여 준다.
지상 조사가 늦었던 사정도 있다. 프놈쿨렌 고원은 20세기 후반 내전기의 은신처였고 오랫동안 지뢰가 남아 있어, 발굴팀이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지도를 먼저 그린 뒤에야 어디를 파야 할지 정할 수 있었던 셈이다.
다만 산 위 생활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경작지가 좁고 물을 가두기 어려운 고원에서 많은 인구를 먹이는 일은 큰 부담이었고, 연구자들은 이런 제약을 수도가 이른 시기에 평원으로 옮겨 간 배경으로 꼽는다.
40~50㎢ 격자와 미완성 저수지 — 마헨드라파르바타의 설계도
라이다 지도 속 마헨드라파르바타는 남북과 동서로 뻗은 큰 축이 약 40~50㎢의 땅을 바둑판처럼 가른 계획도시였다. 앤티쿼티(Antiquity)에 공개된 2019년 논문은 이 격자를 왕궁 터, 피라미드형 국가 사원 터와 한 세트의 도시 설계로 읽는다.
중심부의 격자는 한 변이 약 1.5㎞인 정사각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다. 길과 길 사이의 간격이 되풀이된다는 것은 도시가 자라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도면대로 그어졌다는 뜻이다.
격자 안에는 작은 사당 터와 둔덕, 인공 연못이 촘촘히 흩어져 있었다. 물이 부족한 산 위라는 악조건에도 도로·주거·종교 시설을 처음부터 통째로 계획한 흔적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물의 흔적이다. 둑과 제방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물 관리 체계 한가운데에 길이 1,050m·폭 330m, 완성됐다면 약 35ha였을 저수지가 파다 만 상태로 남아 있었다.
⛰️ 파다 만 저수지 축구장 수십 개 넓이의 물을 산 위에 가두려던 공사가 도중에 멈췄다. 후대 앙코르 평원의 거대 인공 저수지 '바라이'로 이어지는 물 기술의 첫 시도가 미완성인 채 남은 셈이다.
지도가 답하지 못한 것도 있다. 라이다는 둔덕과 구덩이의 형태를 보여 줄 뿐이어서, 이 도시에 몇 사람이 살았는지, 격자가 한꺼번에 그어졌는지 여러 세대에 걸쳐 채워졌는지는 아직 열린 질문으로 남아 있다.
산 위 수도는 오래가지 못했고, 왕조의 중심은 물이 풍부한 평원의 앙코르로 내려갔다. 마헨드라파르바타에 석조 유물이 드문 것은 도시가 작았기 때문이 아니라 목조 가옥과 흙 구조물이 밀림 속에서 삭아 사라졌기 때문이다.
「돌은 남고 도시는 흙이 됐다」 — 마헨드라파르바타 궁금증
Q. 프놈쿨렌은 지금 여행자가 갈 수 있는 곳인가?
A. 폭포와 와불로 유명한 국립공원이라 시엠레아프에서 당일로 다녀오는 코스가 자리 잡았다. 다만 라이다로 확인된 유구 대부분은 정글 속 둔덕 형태라 일반 탐방로에서는 보이지 않고, 과거 지뢰 제거가 진행된 지역이므로 정해진 길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
Q. 라이다로 고대 도시를 찾은 비슷한 사례가 또 있나?
A. 2018년 과테말라의 마야 저지대 조사에서는 항공 라이다로 6만 개가 넘는 구조물이 한꺼번에 확인돼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보고됐다. 멕시코와 아마존 일대에서도 같은 방식의 발견이 이어지며 밀림 고고학의 표준 도구가 됐다.
Q. 마헨드라파르바타에는 왜 앙코르와트 같은 석조 사원이 드물까?
A. 신전 일부를 빼면 도시 대부분이 목재와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유기물 구조는 열대 기후에서 수백 년 안에 분해되므로, 남는 것은 도로 둔덕·제방·연못처럼 땅의 형태로 새겨진 흔적뿐이다.
Q. 라이다 지도가 나오면 발굴은 끝난 것인가?
A. 라이다는 지표의 형태만 보여 주므로 각 구조물의 연대와 용도는 지상 조사와 발굴,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으로 따로 확인해야 한다. 2019년 논문도 항공 측량과 수년에 걸친 현장 조사를 함께 묶어 결론을 냈다.
마헨드라파르바타의 격자는 지금도 프놈쿨렌 밀림 아래 그대로 누워 있다. 발굴은 어느 둔덕부터 열지 고르는 단계이고, 그 순서를 정해 주는 것이 레이저가 그린 지도다.
앙코르와트에서 북동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왕조가 처음 도시를 실험한 산이 있다. 1,200년 가까운 침묵을 깬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가느다란 빛줄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