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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왜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건설자를 믿지 못했을까

글 · 역사·유적 · · 약 11분 · 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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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벽이 남긴 궁금증 세 가지

  • 모르타르(석재를 잇는 접합재) 한 줌 없이 쌓은 석조 도시를, 유럽 탐험가들은 어째서 시바 여왕의 유산이라 단정했나
  • 과학적 발굴은 건설자를 누구로 지목했고, 로디지아 정부는 그 결론을 어떻게 다뤘나
  • 전성기 인구 1만 8,000~2만 명이라는 통설은 2017년 재계산에서 어떻게 1만 명 이하로 내려왔나
AI로 재현한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석벽과 원뿔탑 풍경
이미지: AI 생성 이미지

1871년, 독일 지질학자 카를 마우흐는 짐바브웨 고원의 화강암 언덕 아래에서 이끼 낀 석벽을 올려다보다, 문틀에 걸친 오래된 나무를 칼로 깎아 코에 대 보았다. 자신이 쓰던 연필에서 나던 향이었다. 벽 꼭대기의 덩굴 아래로, 다듬은 돌들이 접착제 없이 정연하게 맞물려 있었다.

마우흐는 그 향을 레바논 백향목의 것이라 여겼고, 여기서부터 아프리카 남부 최대의 석조 도시는 반세기 넘게 남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가 제 이름을 되찾는 과정은 고고학이 정치와 싸워 온 기록이기도 하다. 석벽은 지금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옛 건축으로 소개된다.

연필 향 나무 한 조각은 어떻게 시바 여왕 전설이 됐을까

마우흐는 향긋한 목재를 레바논 백향목으로 판단했고, 이를 근거로 성경 속 시바 여왕의 도시를 찾았다고 기록했다. 페니키아 상인이 목재를 실어 왔고 솔로몬의 금광이 근처에 있으리라는, 당시 유럽에서 인기 있던 상상과 꼭 맞는 결론이었다.

현지인들이 도시를 지었을 리 없다는 전제는 정착민 사회에 편리한 서사였다. 금광과 식민 사업을 넓히던 세실 로즈 측은 유적 조사를 후원했고, 조사원 리처드 홀은 '원주민 층의 오염을 걷어낸다'며 유적 안 퇴적층을 2m 깊이까지 파 없앴다.

1891년에는 로즈 측 후원으로 탐험가 시어도어 벤트가 발굴에 나서 '고대 지중해 쪽 민족의 작품'이라는 취지의 보고서를 냈다. 원하는 답을 먼저 정해 두고 삽을 대던 시절이었다. 벤트가 꾸린 유물 상자는 런던으로 실려 갔고, 일부는 지금도 영국 박물관 소장품으로 남아 있다.

홀이 걷어낸 흙에는 도시의 생활사가 켜켜이 담겨 있었다. 훗날 연구자들이 가장 아까워하는 대목이 이 지점이고, 문틀의 목재는 뒷날의 감정에서 현지에서 자라는 향나무 계열로 보고됐다. 후대 연구자들은 홀이 걷어낸 층위를 '다시는 읽을 수 없게 된 페이지'에 비유하곤 한다.

랜들-매카이버의 삽이 정착민 신화와 충돌했다

이집트학자 데이비드 랜들-매카이버는 1905년 발굴에서 유적의 토기와 생활 유물이 인근 쇼나(카랑가)인의 물건과 같은 계통임을 확인했다. 저명한 고고학자 플린더스 피트리 밑에서 훈련받은 그의 결론은 '중세 아프리카인의 도시'였다. 정착민 사회의 반발은 거셌고, 이후 한동안 본격 발굴이 뜸해졌다고 전해진다.

1929년에는 거트루드 케이턴-톰프슨이 여성으로만 꾸린 발굴단을 이끌고 재조사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층위를 지켜 파낸 두 발굴 모두, 외부 문명의 흔적 대신 현지 문화의 연속성을 찾아냈다. 발굴단은 앞선 조사가 헤집지 않은 지점을 골라 층위를 확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석벽 자체도 증거였다. 화강암이 판처럼 갈라지는 성질을 살려 벽돌 크기로 다듬은 돌을 모르타르 없이 맞물려 쌓았는데, 최고 높이는 측정하는 벽과 지점에 따라 자료마다 9.7~11m로 조금씩 다르게 적힌다.

결론이 나온 뒤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1965년 백인 소수 정권을 세운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에서는 유적 관련 서적과 안내문이 검열됐고, 아프리카인 건설을 말한 고고학자들이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사이언티픽 아메리칸(2005년) 등이 정리했다.

검열의 방식도 구체적이었다. 유적 안내서와 방송에는 건설자를 특정하지 않거나 외부 기원설을 병기하게 하는 지침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이 왜곡은 1980년 독립과 함께 공식적으로 걷혔다.

1980년 독립한 나라는 국호를 이 유적에서 가져왔다. 유적은 198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고, 학계 서술은 11~15세기 쇼나 조상들의 건설로 정리돼 있다. 20세기 후반의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역시 중세 시기를 가리켰다.

그레이트 짐바브웨에는 실제로 몇 명이 살았을까

전성기 인구의 통설은 1만 8,000~2만 명이었다. 케이프타운대 고고학자 샤드렉 치리쿠레 연구진의 2017년 논문은 800년 점유 기간(서기 1000~1800년) 누적으로도 1만 명을 넘기 어렵다고 다시 계산했다.

근거는 도시가 남긴 흔적의 크기다. 수만 명이 살았다면 나와야 할 거대 쓰레기 언덕(메가미든)이 없고, 한꺼번에 붐볐다고 가정돼 온 구역들의 연대가 실제로는 서로 어긋난다는 것이다. 구역들이 시차를 두고 차례로 쓰였다면, 한 시점에 북적인 인구는 통설보다 훨씬 작아진다는 계산이다.

도시의 심장은 언덕 위 왕의 단지였다. 화강암 바위 틈을 벽으로 이어 붙인 이 구역에서 왕은 골짜기의 대구역을 내려다봤고, 소 떼와 금이 권력의 크기를 쟀다.

규모를 줄여 잡아도 도시의 위상은 줄지 않는다. 언덕 위 왕의 단지와 골짜기의 대구역(Great Enclosure), 원뿔탑을 갖춘 이 도시는 금과 상아를 스와힐리 해안으로 보내는 내륙 교역의 중심이었다. 발굴에서는 중국 청자, 페르시아 파이앙스(유약 도기), 아랍계 유리가 나왔다.

물건들이 들어온 길은 스와힐리 해안 항구들을 거치는 인도양 교역로였다. 유럽 선박이 이 해안에 닿기 훨씬 전, 내륙 고원의 도시는 이미 대양 무역망의 한 축이었다. 수출품의 핵심인 금은 짐바브웨 고원의 광맥에서 캐어 해안으로 내려보낸 것이었다.

🪶 돌에서 나온 새  유적에서는 비눗돌(무른 활석계 돌)로 깎은 새 조각 여덟 점이 나왔다. 사람의 입술과 다섯 발가락을 지닌 이 새는 오늘날 짐바브웨 국기와 주화에 새겨져 있고, 독일로 반출됐던 한 점의 아랫부분은 2003년에 돌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짐바브웨 문화의 석조 전통은 이 도시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앞선 시기와 뒤이은 시기의 수도들이 남부 아프리카에 이어져 있다.

유적 시기(대략) 자리와 성격
마풍구브웨13세기 무렵 번성남아공 림포포강 유역, 금 세공품이 나온 언덕 왕궁 — 짐바브웨 문화의 앞 단계
그레이트 짐바브웨11~15세기, 전성 1300~1450년 무렵짐바브웨 고원의 수도, 대구역과 원뿔탑의 석벽 도시
카미1450~1644년 무렵짐바브웨 서부, 그레이트 짐바브웨 쇠퇴 후 토르와 왕조의 수도

발굴은 1905년에 답을 내놓았고, 로디지아 정부는 1965년부터 그 답의 유통을 막았다. 진실이 제자리를 찾는 데 걸린 시간은 증거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였던 셈이다. 오늘날 이 유적은 편견이 과학을 눌렀을 때 무엇이 지워지는지 보여 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확인 시점은 2026년 9월이다. 인구 재추정은 케이프타운대 연구진이 2017년 학술지 플로스 원(PLOS ONE)에 낸 공개 논문을 직접 열어 대조했고, 성벽 최고 높이처럼 자료마다 9.7~11m로 갈리는 값은 어느 한쪽으로 확정하지 않고 폭 그대로 두었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둘러싼 남은 물음들

Q.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지금 방문할 수 있는 곳인가요?

A. 가능합니다. 짐바브웨 남부 마스빙고에서 가까운 국립기념물로, 198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습니다. 언덕 단지와 대구역 사이를 걸어서 도는 동선이 일반적입니다.

Q. '짐바브웨'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가요?

A. 쇼나어 표현에서 온 말로 '돌로 지은 집(dzimba dza mabwe)'으로 풀이됩니다. 1980년 독립한 나라가 유적의 이름을 국호로 삼은 드문 사례입니다.

Q. 도시는 왜 버려졌나요?

A. 15세기 무렵 쇠퇴했다는 데는 자료가 대체로 일치하지만, 원인은 방목지·경작지 소진과 금 교역로 이동 등이 겹쳤다는 추정이 우세할 뿐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주민 일부는 카미 같은 새 중심지로 옮겨 간 것으로 봅니다.

Q. 시바 여왕 이야기는 지금 어떻게 남아 있나요?

A. 현재 학계 서술과 현장 안내는 쇼나 조상들의 건설을 기본으로 적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책과 지도, 옛 관광 문구에 남은 전설의 흔적은 유적사 연구의 사료로 다뤄집니다.

Q. 비눗돌 새 여덟 점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대부분 짐바브웨로 돌아와 수도 하라레의 박물관과 유적 현장 전시관 등에 나뉘어 보관된 것으로 소개됩니다. 새의 실루엣은 국기와 주화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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