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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400년 차탈회위크에는 왜 길이 없었을까

글 · 역사·유적 · · 약 12분 · 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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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짚고 갈 포인트

  • 동쪽 언덕에만 신석기 점유층이 18개 쌓였고, 그 연대는 기원전 7400년부터 6200년까지다.
  • 집들이 등을 맞대 빈틈없이 붙어 있어 길도 골목도 없었고, 출입은 지붕에 뚫은 구멍과 사다리가 전부였다.
  • 굴뚝 없는 실내를 재현해 잰 초미세먼지는 분뇨 연료에서 최대 150,000µg/m³를 넘었다.
AI로 재현한 차탈회위크의 지붕 출입구와 사다리, 등을 맞댄 진흙벽돌집 군락
이미지: AI 생성 이미지

차탈회위크를 소개하는 글은 대개 "적을 막으려고 문을 없앴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근거와 최근 발굴 연구가 이 마을의 배치에서 되풀이해 짚는 것은 방어가 아니라, 집과 집이 등을 맞댄 구조 자체와 거기서 읽히는 균질한 공간 분배다.

튀르키예 남부 콘야 평원에 솟은 두 언덕이 이 유적이다. 기원전 7400년 무렵부터 사람들은 진흙벽돌집을 벽끼리 맞붙여 세웠고, 대문 대신 지붕에 뚫은 구멍으로 드나들었다. 도시라는 말이 생기기 한참 전에 치러진 도시 실험이었다.

차탈회위크 집에는 대문이 어디에 있었을까

어디에도 없었다. 집들이 서로 벽을 맞대고 붙어 있어 옆면에 문을 낼 자리 자체가 없었고, 지붕에 뚫은 구멍이 유일한 출입구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의 등재 설명은 차탈회위크를 "등을 맞대 모여 있는 집들로 이루어진, 지붕으로 출입하는 유일무이한 무가로(streetless) 취락"으로 요약한다.

등재기준 (iv)도 같은 대목을 짚는다. 길 없는 이웃 단위, 지붕 출입 주거, 그리고 방위에 맞춰 정연하게 배치된 활동 공간이 신석기 취락의 한 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유네스코 문서는 이어 집들의 크기가 마을 전체에서 비슷하다는 점을 공동체적·평등주의적 도시 배치의 근거로 든다.

동쪽 언덕 18개 층이 기록한 기원전 7400~6200년

동쪽 언덕에서 드러난 신석기 점유층은 18개이고, 연대는 기원전 7400년에서 6200년에 걸친다. 서쪽 언덕은 기원전 6200~5200년의 금석병용기 층이 중심이라, 두 언덕을 합치면 같은 자리에서 2,000년 넘게 이어진 정착이 된다. 벽화와 부조, 조각이 함께 나온 것도 동쪽 언덕이다.

소재지튀르키예, 남아나톨리아 고원의 콘야 평원
유적 면적37헥타르 (완충구역 110.74헥타르)
언덕 높이평원 위로 최대 20미터
동쪽 언덕신석기 점유층 18개, 기원전 7400~6200년
서쪽 언덕금석병용기 층, 기원전 6200~5200년
세계유산 등재2012년, 등재기준 (iii)·(iv)

지붕이 길이었다면 차탈회위크 사람들은 어떻게 이동했을까

사람들은 이웃집 지붕을 가로질러 걸은 다음, 자기 집 지붕 구멍으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캐시 트위스 연구팀이 2024년 PLOS ONE에 발표한 분석은 이 마을을 "너무 빽빽하게 모여 있어 많은 사람이 이웃의 맞붙은 지붕을 건너 사다리로 자기 집에 내려가야 했던" 곳이라고 묘사한다.

지붕은 그러니까 현관이자 광장이자 통로였다. 옆으로 난 문이 없으니 이웃과의 접촉은 실내가 아니라 머리 위에서 일어났고, 마을의 동선은 평면이 아니라 지붕이라는 한 층 위에 그려졌다. 집 안에는 화덕과 아궁이, 낮은 단, 저장 공간이 규격처럼 반복해 들어갔다.

굴뚝 없는 집에서 실제로 잰 초미세먼지

2017년 7월 11~13일 유적 옆 복제 가옥에서 실제로 불을 피워 잰 초미세먼지(PM2.5)는, 가축 분뇨를 태웠을 때 최대 150,000µg/m³를 넘었다. 리사마리 실리토 연구팀이 Environmental Geochemistry and Health(2022)에 실은 실험 결과다. 장작을 태운 최댓값은 36,000µg/m³였다.

논문이 비교 기준으로 든 값은 유럽 기준치 25µg/m³, WHO 기준치 20µg/m³다. 두 연료 모두 그 기준을 몇 자릿수씩 웃돌았다. 연구팀은 굴뚝이나 연도의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는 점, 실험 가옥에서 불을 피울 때마다 실내가 순식간에 연기로 찼다는 점을 함께 적었다.

구조를 보면 이유가 짐작된다. 차탈회위크의 전형적인 집은 남쪽 벽에 붙은 돔형 화덕을 두었고, 그 화덕은 지붕에 뚫린 구멍 바로 아래 놓였다. 출입구가 곧 연통이었던 셈인데, 논문은 개구부나 굴뚝이 없어 환기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탓에 입자가 축적됐다고 정리했다.

복제 가옥에는 문이 하나 달렸다  1997~1999년 방문자센터 남쪽에 신석기 가옥 복제품이 지어졌다. 원래 집에는 창도 문도 없었지만, 이 복제 가옥에는 "실용적인 이유로" 문이 하나 났다고 논문은 밝힌다. 실험 중 한 번은 관람객이 그 문을 열면서 연기가 빠져나가 10분가량 측정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차탈회위크는 정말 평등한 도시였을까

지니계수로 재보면 시기마다 답이 달라진다. 트위스 연구팀은 저장 공간 넓이, 곡물 가공 설비, 벽화, 외래 조개, 매장 인원과 부장품 같은 여러 자료군에서 각각 지니계수를 계산했고, 불평등이 한 방향으로 진행했다는 흔적은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해석의 폭은 오래전부터 넓었다. 제임스 멜라트는 발굴을 마친 뒤 "건물과 장비의 크기, 부장품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시사된다"고 썼고, 이언 호더는 같은 마을을 "치열한 평등주의"라고 불렀다. 요약본이 흔히 전하는 완전한 평등은 2024년 분석과 그대로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2024년 논문의 결론은 중간 지대에 놓인다. 주식(主食)에 대한 접근은 대체로 고르되 생존과 직결되지 않는 물품에서는 격차가 있었고, 점유 중기에 소득 불평등이 비교적 높아졌다가 의도적으로 눌린 정황이 보이며, 제도화되거나 대를 이어 지속된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의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헐고 다시 짓기를 반복한 차탈회위크의 집, 바닥 아래의 741명

차탈회위크의 집은 일정 기간 쓰인 뒤 헐리고 같은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사용 기간 추정은 자료마다 갈리는데, 2022년 실리토 논문은 약 70년으로, 2024년 트위스 논문은 평균 수십 년으로 적는다. 새 집의 벽은 앞선 집의 벽 자국 위에 그대로 올라갔고, 그렇게 겹쳐 쌓인 것이 18개 층이다.

바닥 아래는 무덤이었다. 트위스 연구팀은 층위가 확인된 맥락에서 최소 741명분의 유해가 수습됐다고 정리했다. 471명분은 1차 매장, 270명분은 2·3차 매장 맥락에서 나왔다. 무덤은 보통 집 북쪽 바닥 아래에 있었고, 아주 어린 영아는 남쪽 구역이나 측실에서 더 자주 발견된다.

차탈회위크가 남긴 도시 실험

길을 내지 않은 마을은 결국 지붕을 길로 삼았고, 문을 내지 않은 집은 출입구를 연통과 겸하게 했다. 하나를 포기하면 다른 하나가 그 역할을 떠맡는 구조가 마을 전체에 반복된 셈인데, 그 대가는 폐에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2022년 실험의 함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복제 가옥의 문 하나다. 원본을 최대한 그대로 재현하겠다고 지은 건물조차 실용적인 이유로 문을 달아야 했다. 기원전 7400년의 사람들이 매일 감당한 조건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사소한 타협이 오히려 또렷하게 알려 준다.

2026년 9월에 확인한 자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의 차탈회위크 등재 문서와, PLOS ONE(2024)·Environmental Geochemistry and Health(2022)에 실린 두 편의 연구다. 집 한 채의 사용 기간을 두 논문이 약 70년과 평균 수십 년으로 다르게 적는데, 어느 쪽도 산정 방식을 본문에 밝히지 않아 여기서는 양쪽 표기를 그대로 남겼다.

"길도 대문도 없었다"는 말 뒤에 남는 질문

Q. 차탈회위크는 지금 방문할 수 있나요?

A. 유적은 튀르키예의 문화유산 보호 법령 아래 관리되고 있고, 유네스코 등재 문서는 두 곳의 주요 발굴 구역 위에 보호용 셸터를 세워 비바람의 직접 영향을 줄였다고 적습니다. 방문자센터 남쪽에는 1997~1999년에 지은 신석기 가옥 복제품도 있습니다. 다만 개방 시간과 입장 조건은 등재 문서에 담긴 정보가 아니므로 현지 안내를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Q. 차탈회위크는 언제 처음 발견됐나요?

A. 1958년입니다. 유네스코 등재 문서는 유적이 처음 발견된 1958년 이후 두 언덕의 물리적 규모와 형태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진정성 평가의 근거로 들었습니다. 그 뒤 40년이 넘는 발굴과 기록이 쌓였습니다.

Q. 집 안 바닥 아래에 사람을 묻었다는 게 사실인가요?

A. 사실입니다. 2024년 분석에 따르면 차탈회위크 연구 프로젝트 발굴진이 층위가 확인된 맥락에서 수습한 유해는 최소 741명분이고, 이 가운데 471명분이 1차 매장, 270명분이 2·3차 매장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거의 전부가 특정 집의 바닥 아래 매장이며, 무덤 자리는 보통 집 북쪽입니다.

Q. 지붕으로만 드나들었다면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어떻게 했나요?

A.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발굴 보고는 남쪽 벽 화덕 위 지붕 구멍을 출입구로 보고 사다리로 오르내렸다고 설명하지만, 노인이나 환자의 출입을 어떻게 도왔는지는 여기서 인용한 자료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다리 실물이 남아 있지 않아 형태 역시 복원 추정에 기대고 있습니다.

Q. 비슷한 신석기 마을이 또 있나요?

A. 있습니다. 2024년 분석은 차탈회위크의 저장 공간 불평등 지표를 서남아시아의 다른 신석기 농경 유적과 나란히 놓고 비교했고, 시리아의 사비 아비아드가 그 비교 대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만 길 없는 배치와 지붕 출입이 이 정도 규모로 함께 나타나는 사례로는 차탈회위크가 대표로 꼽힙니다.

차탈회위크신석기 도시세계유산아나톨리아 고고학지붕 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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