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숨은 이야기

형광 분홍 민달팽이가 호주 이 산 하나에만 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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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줄 요약

  • 호주 카푸타르산 정상부에만 사는 길이 20cm의 형광 분홍 민달팽이는, 지구 어디에도 없는 고유종입니다.
  • 주변이 모두 건조한 평원인데 이 산만 서늘하고 축축한 '하늘의 섬'이라, 곤드와나 시절 우림 생물이 갇힌 채 살아남았습니다.
  • 2019년 산불로 90%가 사라졌지만 바위 틈에서 버틴 60여 마리가 확인됐고, 지금은 한 번에 300마리까지 관찰될 만큼 회복했습니다.
호주 카푸타르산 숲 바닥의 형광 분홍 민달팽이
이미지: Photo by Chris F on Pexels

비가 지나간 다음 날 이른 아침,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내륙의 안개 낀 산길. 젖은 붉은 낙엽 사이로 형광펜을 칠한 듯한 분홍색 덩어리가 천천히 움직입니다. 길이는 어른 손바닥을 훌쩍 넘는 20cm 남짓. 버려진 플라스틱 조각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민달팽이이고, 이 생물은 지구상에서 오직 이 산 하나에만 삽니다.

왜 하필 이 산 하나뿐일까?

카푸타르산이 주변 세계와 완전히 끊긴 '하늘의 섬(sky island)'이기 때문입니다. 호주 동해안에서 약 270km 내륙, 나라브리 인근에 솟은 사화산 지형으로 정상 높이는 1,508m입니다. 산 아래로는 건조한 평원이 끝없이 펼쳐지는데, 유독 이 봉우리에만 비와 안개, 때로는 눈까지 내려 서늘하고 축축한 소기후가 유지됩니다.

이 조건을 만든 것은 약 1,700만 년 전의 화산활동입니다. 그때 솟은 높고 험한 지형이 습기를 붙잡아두는 그릇이 됐습니다. 호주가 곤드와나 초대륙의 일부였던 시절 이 일대는 울창한 열대우림이었는데, 이후 대륙이 건조해지며 우림에 의존하던 생물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산 위에 남은 것들만이 마지막 습한 조각에 갇힌 채 수백만 년을 버텼습니다. 이 민달팽이의 친척이 뉴기니, 뉴칼레도니아, 뉴질랜드, 동아프리카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모두 한때 곤드와나로 이어져 있던 땅입니다.

그 결과 이 좁은 고지대에는 지구 어디에도 없는 육상 달팽이가 9종이나 몰려 삽니다. 분홍 민달팽이는 그중 가장 유명한 얼굴일 뿐입니다.

형광 분홍은 위장색일까, 그냥 우연일까?

가장 널리 퍼진 설명은 '위장색'입니다. 눈이 아플 만큼 밝은 분홍이 어떻게 위장이냐 싶지만, 낮 동안 숨어 있는 곳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카푸타르산의 유칼립투스는 붉게 물든 잎을 두껍게 떨구는데, 젖은 낙엽 더미 위에서는 분홍 민달팽이가 놀랍도록 잘 섞입니다. 약점처럼 보이던 색이 실은 은신의 비결이었다는 반전입니다.

다만 자료를 하나씩 대조해 보면 이 설명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유력한 가설입니다. 결정적인 반박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이 민달팽이는 밤이 되면 낙엽을 떠나 나무 줄기를 타고 올라가 껍질에 낀 이끼와 조류를 훑어 먹습니다. 축축한 회갈색 껍질 위에서 형광 분홍은 위장이 되기는커녕 표적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이 색이 특별한 기능 없이 굳어진 진화의 우연일 가능성도 열어둡니다.

대중매체가 흔히 '완벽한 위장색'이라고 단정하는 것과 달리, 원 자료들은 대체로 "그럴 수 있다"는 표현에서 멈춰 있습니다. 왜 이 색이 수백만 년 동안 사라지지 않고 유지됐는지는 여전히 열린 질문입니다.

2019년 산불이 90%를 지웠다, 그리고 돌아왔다

2019년 말, 이른바 '블랙 서머' 산불이 카푸타르산 고지대를 그대로 관통했습니다. 도망칠 다른 산도, 내려갈 습한 골짜기도 없는 생물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였습니다. 조사 결과 개체군의 약 90%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됐고, 한동안은 종 전체가 끝났다는 우려까지 나왔습니다.

✨ 흥미로운 사실  불길이 지나간 뒤 2020년 1월 조사에서 최소 60마리가 살아 있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연구진은 이들이 축축한 바위 틈에 몸을 밀어 넣어 열을 피한 것으로 봅니다. 종 하나의 운명이 바위 몇 개의 그늘에 달려 있었던 셈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회복을 어떻게 확인했는가입니다. 이 민달팽이는 비 온 뒤 새벽에만 잠깐 모습을 드러내 연구진이 상주하며 세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국립공원 측은 레인저 조사에 더해 방문객이 목격 지점을 바로 기록해 보내는 'Slug Sleuth' 앱을 활용했고, 이 경로로만 850건이 넘는 보고가 쌓였습니다. 여기에 불탄 구역과 타지 않은 구역의 밀도를 비교하는 조사가 더해지며, 감소와 회복의 크기를 숫자로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결과는 예상보다 밝았습니다. 습한 라니냐 해가 이어지며 번식이 활발해졌고, 최근에는 한 번의 관찰에서 300마리까지 확인됐습니다. 일부 구역의 밀도는 산불 이전 수준에 근접한 것으로 보고됐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아직 정식 이름이 없다

이 민달팽이의 학명을 찾아보면 Triboniophorus aff. graeffei, 또는 Triboniophorus sp. nov. 'Kaputar'라고 적혀 있습니다. 'aff.'와 'sp. nov.'는 아직 정식으로 기재되지 않은 종이라는 표시입니다. 전 세계 매체가 사진을 실어 나르고 IUCN 적색목록에 '위기(Endangered)'로까지 등재된 생물이, 정작 자기 이름은 갖지 못한 것입니다.

'2013년 발견'이라는 표현도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해 국립공원야생동물국 레인저 마이클 머피의 이야기가 보도되며 세계적 화제가 된 것은 맞지만, 이렇게 크고 눈에 띄는 생물이 지역 주민에게 낯설었을 리 없습니다. 2013년은 '발견'된 해라기보다 세계가 알게 된 해에 가깝습니다.

서식지호주 NSW 카푸타르산 국립공원 고지대에만 (정상 1,508m)
크기길이 약 20cm, 폭 4~6cm
먹이·습성야행성, 나무를 타고 올라 이끼·조류를 먹음
보전 상태IUCN 적색목록 위기(Endangered), 학명 미기재

같은 산에는 점액 자취를 추적해 다른 달팽이를 사냥하는 육식성 달팽이도 3종이나 함께 삽니다. 분홍 민달팽이 입장에서는 이웃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은 셈입니다. 다만 전문가들이 꼽는 가장 큰 장기 위협은 포식자도, 산불도 아닌 기후변화입니다. 하늘의 섬에 사는 생물에게는 더 서늘한 곳으로 옮겨갈 '위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산의 달팽이 군집에 관한 자세한 조사 기록은 호주박물관(Australian Museum)의 카푸타르 달팽이 연구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카푸타르 분홍 민달팽이는 어디에 사나요?

A.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카푸타르산 국립공원의 고지대(정상 1,508m)에만 삽니다. 이 좁은 구역을 벗어난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Q. 크기가 얼마나 되나요?

A. 길이가 약 20cm, 폭이 4~6cm 정도로 어른 손바닥보다 큽니다. 민달팽이 중에서도 매우 큰 편에 속합니다.

Q. 왜 이렇게 밝은 분홍색인가요?

A. 붉게 물든 유칼립투스 낙엽 사이에서 위장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 가장 유력합니다. 다만 이 민달팽이가 밤에는 나무 줄기 위에서 활동한다는 점 때문에 확정된 결론은 아니며, 특별한 기능 없이 굳어진 색일 가능성도 남아 있습니다.

Q. 2019년 산불로 멸종했나요?

A. 아닙니다. 개체군의 약 90%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2020년 1월 조사에서 최소 60마리의 생존이 확인됐고 이후 꾸준히 회복해 최근에는 한 번에 300마리까지 관찰됐습니다.

Q. 정식 학명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A. 학명에 붙은 'aff.'나 'sp. nov.'는 아직 정식으로 기재되지 않은 종이라는 표시입니다. IUCN 적색목록에 위기종으로 등재될 만큼 알려졌지만, 공식 종 기재 절차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주변이 모두 마른 평원으로 변해가는 동안, 산 하나가 통째로 오래된 세계의 피난처가 됐습니다. 형광 분홍 민달팽이는 그 피난처가 아직 작동한다는 가장 눈에 띄는 증거입니다. 다만 하늘의 섬에는 더 서늘한 곳으로 올라갈 위층이 없다는 사실이, 이 분홍색 생존자들이 남겨둔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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