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파키스탄 신드주의 인더스강 오른편에 솟은 흙무지에서 오래된 도시가 확인됐다. 무지 꼭대기에는 서기 2세기에 굽지 않은 벽돌로 세운 불교 스투파가 서 있었다. 그 아래 흙 속에 묻혀 있던 것은 스투파보다 2천 년 이상 앞선 시대의 거리와 벽돌 벽, 그리고 배수로였다.
발굴이 진행될수록 낯선 그림이 나왔다. 거리는 남북과 동서로 반듯하게 교차했고, 집집마다 물을 쓰는 자리가 있었으며, 그 물이 흘러 나가는 길이 큰길 밑에 마련돼 있었다. 그런데 도시 어디에도 왕이 살았을 법한 건물이 없었다.
2026년 9월에 대조한 자료는 애덤 S. 그린이 2022년 Frontiers in Political Science에 실은 인더스 도시 연구와,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가 공개한 모헨조다로 등재 정보다. 도시 인구 규모는 추정 폭이 자료마다 크게 갈려 이 글에서는 수치로 적지 않았다.
기원전 2600년에서 1900년 사이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집 안 목욕대에서 쓴 물을 큰길 아래 공용 배수로로 흘려보냈다. 왕궁도 왕의 무덤도 없이.
모헨조다로의 물은 집 안에서 어떻게 큰길로 빠져나갔을까
모헨조다로의 배수는 집 안 목욕대에서 시작해 큰길 밑 배수로에서 끝났다. 그린이 정리한 인더스 도시의 물 시설은 우물, 관, 홈통, 그리고 물을 땅으로 스며들게 하는 ‘소크’로 이뤄져 있었고, 이 장치들이 개별 가옥의 목욕 공간에서 나온 물을 밖으로 빼내는 역할을 맡았다.
연결 방식이 특히 눈에 띈다. 그린의 2022년 논문에 따르면 공용 배수로는 넓은 거리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였고, 각 가구는 자기 집에서 그 배수로까지 이어지는 관을 스스로 만들어 붙였다. 도시가 정한 위치 규칙에 개인이 맞춰 들어가는 구조였던 셈이다.
도시 전체의 배치도 그 규칙을 따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의 설명에 따르면 모헨조다로는 서쪽의 성채 구역과 동쪽 아래 도시로 나뉘고, 아래 도시의 건물들은 직각으로 교차하는 거리를 따라 늘어서 있다. 위생과 배수 체계는 이 도시 계획 안에 처음부터 들어가 있었다.
물을 얻는 쪽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자료는 우물과, 오수를 처리하는 스며듦 구덩이, 대형 곡물 창고를 이 도시의 특징으로 꼽는다. 물을 끌어오는 시설과 내보내는 시설이 한 도시 안에서 짝을 이루고 있었다는 뜻이다.
벽돌 규격이 이런 조립을 떠받쳤다. 인더스 도시의 구운 벽돌은 크기가 놀랄 만큼 일정했고, 그린이 인용한 기록은 그 규격의 핵심을 “길이가 너비의 두 배”라는 비례로 짚는다. 이 비율이면 벽돌을 길게 눕히든 짧게 돌려 놓든 층이 어긋나지 않는다.
규격이 곧 기술이다 너비의 두 배를 길이로 잡으면 벽돌을 가로세로로 번갈아 쌓아도 이음매가 맞물린다. 그린은 이 방식이 튼튼한 이음매와 반듯한 모서리, 선이 살아 있는 벽면을 만들어 냈다고 적었다. 배수관과 목욕대처럼 물이 새면 안 되는 구조물일수록 이 정밀함이 필요했다.
왜 모헨조다로에서는 왕궁이 나오지 않을까
모헨조다로에서는 궁전도, 출입이 제한된 신전도, 왕의 무덤도, 통치자를 과시하는 기념물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린은 인더스 문명에 이런 요소가 없다는 점을 근거로, 고고학자가 지배계급의 존재를 추론할 통상적 단서 자체가 빠져 있다고 짚었다.
대신 도시의 큰 건물들은 여럿이 함께 쓰는 쪽으로 지어졌다. 널리 알려진 대목욕탕이 그렇고, 한 변이 30미터를 넘고 벽돌 기둥이 스무 개 이상 서 있던 ‘기둥 홀’도 그렇다. 그린은 이 공간이 수백 명을 들일 수 있었고, 함께 결정을 내리는 자리로 쓰였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린이 대안으로 제시한 그림은 왕 대신 조직이다. 시민 행정 조직과 길드에 가까운 결사, 보통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가는 기구들이 협력을 조율해 물 시설과 공공 건물 같은 공공재를 만들어 냈다는 설명이다. 논문 제목의 ‘통치자 없는 세입’이라는 표현이 그 논지를 압축한다.
규모도 작지 않았다. 인더스 도시들의 조밀한 중심부는 대개 50헥타르를 훌쩍 넘었다. 이 정도 도시를 흙 플랫폼 위에 올리는 일은 막대한 노동을 요구했는데, 그린이 인용한 그레고리 포셀의 2002년 추정에 따르면 플랫폼 하나를 쌓는 데만 400만 인일이 들었을 것으로 계산된다.
노동은 있었는데 주인은 없다 400만 인일이라는 숫자는 누군가 사람을 대규모로 동원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동원을 지시한 왕의 무덤도, 그를 기린 조각도 나오지 않는다. 그린이 2020년 Journal of Archaeological Research에 발표한 논문은 제목부터 ‘사제왕 죽이기’를 내걸고 이 공백을 다뤘다(DOI 10.1007/s10814-020-09147-9).
인더스 문자는 무엇이 해독을 가로막고 있을까
인더스 문자는 기호 목록이 정리돼 있는데도 명문이 너무 짧아 해독이 막혀 있다. 라제시 라오와 이라바탐 마하데반 등이 2009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낸 분석은 마하데반이 정리한 독립 기호 417개를 바탕으로 삼았고, 이때 다룬 명문은 1,548줄에 기호 약 7,000개 규모였다.
문제는 한 줄의 길이다. 같은 논문은 인더스 명문의 평균 길이를 약 5기호로 잡았다. 문장 하나가 다섯 글자 남짓이면 문법 구조를 복원할 단서가 크게 줄고, 뜻을 확인해 줄 이중언어 비문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연구팀은 80년 넘게 해독 주장이 이어져 왔지만 문자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고 적었다(DOI 10.1073/pnas.0906237106).
분석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것은 아니다. 라오 연구팀은 기호가 이어지는 통계적 규칙성을 분석해, 이 기호들이 단순한 상징 모음이 아니라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문자 체계에 가깝다는 결론을 냈다. 무엇을 적었는지는 몰라도, 적는 체계였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 셈이다.
이름조차 남지 않았다. 오늘날 쓰는 ‘모헨조다로’는 현지어에서 온 후대의 호칭이며,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자기 도시를 뭐라 불렀는지는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하수도 설계도까지 남긴 도시가 정작 자기 이름은 전하지 못한 것이다.
모헨조다로, 무엇이 더 궁금한가?
Q. 모헨조다로는 지금 어디에 있고 직접 갈 수 있나요?
A. 파키스탄 신드주 라르카나 지구에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자료 기준으로 카라치에서 북동쪽으로 510킬로미터, 라르카나 시내에서 28킬로미터 떨어진 인더스강 오른쪽 기슭입니다. 1980년 세계유산에 등재됐고 현지 관리는 신드주 문화부가 맡고 있습니다.
Q. 유적은 지금 어떤 위협을 받고 있나요?
A. 가장 큰 문제는 소금입니다. 인더스강 수위가 올라가면서 지하수가 높아졌고, 그에 따른 염분 작용이 벽돌 기초를 갉아먹고 있습니다. 1970년대 유네스코가 국제 캠페인을 벌여 피해를 일부 줄였고, 홍수를 막기 위한 제방과 수제 공사도 이어졌습니다.
Q. 인더스 문자가 앞으로 해독될 가능성은 있나요?
A. 길게 이어진 문장이나 이중언어 비문이 새로 발견되면 가능성이 열립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명문은 평균 다섯 기호 안팎으로 짧아, 통계 분석으로 구조를 추정하는 연구가 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Q. 모헨조다로의 배수 시설은 오늘날 하수도와 같은 것인가요?
A. 설계 목표가 오늘날과 다릅니다. 오수를 한곳에 모아 처리하는 현대식 하수처리 개념 대신, 집에서 나온 물을 관으로 빼 거리 아래 배수로로 보내거나 땅에 스며들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처리보다 배출과 침투에 초점을 둔 설계입니다.
모헨조다로가 아직 다 대답하지 못한 것
발굴은 여전히 초반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는 이 유적의 구운 벽돌 구조물이 240헥타르에 걸쳐 있고, 1922년 이래 발굴된 부분은 그중 3분의 1 정도라고 밝히고 있다. 도시의 3분의 2는 아직 흙 아래에 있다는 뜻이다.
유네스코 자료 안에서도 표기가 갈리는 대목이 있다. 유네스코 페이지의 짧은 소개문은 이 도시를 “전부 굽지 않은 벽돌로 지었다”고 적는 반면, 같은 페이지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항목은 “주로 구운 벽돌로 지었다”고 쓴다. 물에 닿는 배수 구조에는 구운 벽돌이, 흙 플랫폼과 후대의 스투파에는 굽지 않은 벽돌이 쓰인 정황을 감안하면 두 표기가 가리키는 대상이 다를 가능성이 크다.
왕이 없는 도시가 어떻게 4세기 넘게 규격과 배수망을 유지했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은 질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다. 모헨조다로에서 가장 정성 들여 만든 구조물은 왕의 무덤이 아니라 물이 지나가는 길이었다.


